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아이히만 (문단 편집) == 기타 == 아이히만이 [[유대인]]이라는 설도 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 왜 동족들을 배신하고 나치 편으로 들어가 대학살을 저질렀냐는 질문을 하자 거리낌없이 >"내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이 얼마나 위험한 종족인지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국내 서적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 군부대 정신교육 서적에서도 아이히만을 잡은 이스라엘을 두고 동족을 배신한 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친위대]]에 들어간 게 1932년인 걸로 보아 유대인 혈통은 아닐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면 [[만슈타인]]과 같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사실 '''아이히만 본인이 퍼뜨린 소문이었다.''' [[텔아비브]] 근처에서 태어나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유대인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아이히만은 독일 본토 출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전술했던 것처럼 젊은 시절 유대인 '''처리'''방안을 위해 출장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오히려 그 소문을 자신의 출세에 활용할 정도로 교활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서 소문을 계속 확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한편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시켰고[* 가장 악랄하다고 소문이 난 아이히만이 자신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전문가로서의[* 자신이 유대인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유대인을 처리하는데 최고의 적임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지위와 인정을 강화했다.[* '유대인을 잘 아는 유대인 사냥꾼'이라는 아이히만의 모습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메인 악역인 [[한스 란다]] SS 대령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관련돼서 국내서적 중에서는 이때 아이히만의 발언이 >"나를 유대교로 개종시켜달라" 였다고 한다. 재판관이 이유를 물어보자 말하기를 >"그러면 유대인을 이 세상에서 하나 더 지울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답했다. 모사드는 '''[[요제프 멩겔레]]'''와 아이히만의 소재를 모두 파악해냈고 그중에서 누굴 먼저 잡을까 고심하다가 아이히만을 먼저 잡기로 결심했는데 멩겔레는 아이히만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시 잠적해버려 멩겔레는 잡지 못했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멩겔레의 본거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뒤에나 간신히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러한 소문은 이스라엘에서 퍼뜨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멩겔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히고 나서 더욱 더 조심해서 생활했고 그가 끝까지 잡히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아이히만이 잡히기 전에 멩겔레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던지라 친분으로 잘 지냈다면 모사드가 멩겔레까지 덤탱이로 잡았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 [[하인츠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하인츠 하이드리히]]와 상당히 친했다. 하인츠가 자살했을 때도 가장 슬퍼했다. 그러나 하인츠가 유태인과 집시를 몰래 구출시킨 건 죽는 날까지 알지 못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부가 1954년에 사형제를 폐지한 이후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 유일무이한 사형수이다.[* 그 이전에는 건국 직후인 1948년에 군형법에 따라 아랍 국가와의 간첩 혐의로 처형된 메이어 토비안스키라는 육군 대위가 유일한 사형수였다.] 이스라엘은 사형제가 폐지되었지만 전시상황이나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예외로 하고 있고, 아이히만의 죄목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해당해 사형이 선고 및 집행되었다. 한편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낳은 막내아들인 리카르도 아이히만(Ricardo Francisco Eichmann, 1955~)은 성장한 후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만행을 접하고는 아버지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그의 처형은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쌍벽으로 악명높은 [[일본 제국]]의 前 총리인 [[도조 히데키|히데키]]의 손녀이자 할아버지의 만행을 '''옹호했던''' [[도조 유코|유코]]와는 정반대인 셈이다.] 197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후 1995년부터 2019년까지 고고학 교수로 근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